정원은 평화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외교적 방문자에게만 그러하다. 이 장소는 그 자체로 수많은 생명과 은총을 내포하고 있으며, 중력 또한 그 수만큼 존재한다. 그것이 모든 생명을 잡아 가둠으로써 만족을 느끼는 모형정원 취미가 아니라 하더라도, 정원은 그 자체로 담지자의 전투적인 조율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조율의 대상은 무엇인가? 요컨대 정원에 주인 따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정원사도 정원의 주인이 아니지만, 그는 정원의 일부가 됨으로써 그 생태계의 기능이 되고 역할을 도맡는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정원사에게 있어 조율이라는 결과를 낳지만, 정원 전체의 입장에서 그것은 시간에 따른 존재양식의 변화로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정원사의 조율이라 하는 것은 외부 세계와 정원을 잇는 브로커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외부 세계에서 보았을 때 정원사는 정원이 주변 환경을 파악하고 적응하기 위해 파견한 대행자, 에이전트들이다. 따라서 이 대행자들은 일견 정원의 거주민들이 흔히 공유하는 정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이지만, 그 임무는 정원의 최전선 수호와 확장이기에 이들은 흔히 정원칼과 전정가위, 모종삽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그러나 "차 한 잔을 향한 열망뿐이었던" (시몬 베유) 빌헬름 2세의 세계 정책과 같은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다. 제국 수상 베른하르트 폰 뷜로의 파괴적인 말을 빌리면 이렇다: "요컨대, 우리는 그 누구도 압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양지바른 곳에 우리의 자리가 마련되기를 요구할 뿐이다 (Mit einem Worte: wir wollen niemanden in den Schatten stellen, aber wir verlangen auch unseren Platz an der Sonne)." 정원사가 정원을 조율한다는 것은 착각이며, 최초의 정원사인 아미티스와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그러했듯이 그들은 정원이 바깥 세계를 조율하기 위한 전권 대사이자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들 중 어떤 부류들은 폐허와 버려진 도시들을 선호하는데, 이곳은 그들의 본국인 끝없는 담쟁이들과 이끼가 서식하기에 아주 좋은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굳이 이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들은 어떠한 인류 문명의 부산물의 부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다. 나 또한 비교적 비둘기파에 가까우면서도 이러한 입장만은 공유한다는 점을 밝혀 두어야겠다. 또한 우리는 컴퓨터 네트워크에 지대한 개척자적 흥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일부로 포함될 만한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그 네트워크에 기생하며 그것을 실 소유하고 있는 레우코클로리디움 파라독섬들, 그러니까 구글 캘린더와 슬랙, 인스타그램과 줌 미팅에 그 생식기와 섭취 기관을 꽂아넣고 기생하는 인간 좀비들을 먼저 장악하여 차지할 (乗っ取る) 필요가 있다. 이들은 정원사들이 거는 말에 대답하지도 못하며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는데, 네트워크에 그들이 가진 두 가지 구멍을 결속시키고 꿈틀거리며 양분을 얻는 것만이 이들이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원사들은 이들의 눈코입에서 동충하초와 같은 우리의 담지자들이 튀어나오게 할 수 있는데, 위상기하적으로 이들의 구멍들 중 인바운드 트래픽을 허용하는 것들은 오직 네트워크 포트에만 연결되어 있기에 정원사들은 먼저 네트워크에 침투함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정원사들은 또한 이러한 기생충들에게 기생함으로 이들의 전략을 전용하는데, 그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기생자의 기생 대상으로부터 침투 벡터를 찾는 것이다. 정원사들은 네트워크의 몇몇 노드들에 정착하여 정원이 확장될 수 있는 전초기지와 정착촌을 꾸린다. 이를 위해 동일한 웹의 층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그러나 조우 및 상호 작용이 불가능하지는 않은 디지털 가든들에 gemini 프로토콜 같은 대량 텍스트와 말뭉치들의 비가 내린다. 이들은 모형정원처럼 보이지만 텍스트의 비를 맞는 순간 순식간에 성장하고 증식하며 그곳을 정원으로 만들고, 콘크리트를 그들의 일부로 흡수한다. 요컨대 콘크리트는 정원을 배제하려 하고 끝내 실패하지만, 정원은 그 무엇도 배제하지 않되 다만 부식시키며 변화시킬 뿐이다. 일단 전개되면 무엇이든 정원의 일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원은 언어의 부식을 비료로 삼는다. 언어란 사물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기에, 콘크리트와 컴퓨터 네트워크는 현대의 정원에게 있어 좋은 비료이다.

또한 LLM은 좋은 제충제 역할을 하는데, 정원사들과 달리 기생충들은 기본적으로 독성을 띤 LLM의 텍스트들을 해독하여 양분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페퍼민트, 리모넨, 커피. 따라서 대형 언어 모델의 em dash들과 동종교배의 재앙으로 가득해 보이는 네트워크의 인공 컨텐츠들은 일견 기생충들의 바다를 암시하는 듯하지만, 그것들 또한 정원사들 중 한 일파가 살포한 제충제의 일종이다. 페로몬 유사체나 자일리톨과 비슷한 이 성분들은 기생충들로 하여금 동일한 상호 복제적 행동들만 반복하다가 탈진하여 쓰러지도록 만드는 기능을 가졌으나, 텍스트에 대해 튼튼한 위장을 가진 정원사들은 이것을 쉽게 분해하고 변환하여 섭취할 수 있다 (이러한 농약 사용 자체에 대해 강력한 반감을 가진 정원사 파벌 또한 존재하며, 이들은 대체로 식용 작물을 재배하며 유기농 농법을 선호하는 실용주의적 정원사들로 구성된다).

정원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층위에 그 존재를 드러내며, 순수지속적 시간성 안에서 지각된다. 따라서 초보 정원사를 위해 정원의 공간에서 해충과 기생충을 정의하는 법을 가르치려면 그것이 시간을 얼마나 파편화시키느냐를 척도로 삼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특정 미생물들을 어떠한 가속주의적 시험관 속에서 배양시킬지 말지는 나중 문제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미생물들을 관찰하고 정원의 논리로 이들을 분류해서 그 판별법을 제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주변에서 생산성을 빌미로 동시에 여러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열어놓고 대화하는 이들이나, 대화 도중 컴퓨터 네트워크 너머의 여러 환상들과 무분별하게 교접하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행동의 관찰로부터 존재론적 범주로의 이행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 물을 수 있다. 핵심은 이것이다. 시간을 파편화하는 행위는 주의력의 분산을 넘어서 존재 양식 자체의 변형을 수반한다. 지속 안에 거주하는 존재는 대화를 하나의 흐름으로 경험하며, 그 흐름 안에서 자신과 타자가 공동으로 변이한다. 반면 시간을 이산적 단위들로 분절하는 존재는 각 채널을 전환 가능한 슬롯으로 취급하며, 대화를 정보 패킷의 교환으로 환원한다. 이때 대화의 상대방 또한 슬롯 중 하나로 환원되며, 교환 가능한 노드가 된다. 이러한 존재에게 타자란 네트워크 토폴로지 상의 한 주소에 불과하다.

비명이 패킷으로 도착하며, 프로토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패킷은 무시된다. 응? 무슨 말이야? 내 생각? 잘 모르겠어. 어쨌든 모두를 철사로 칭칭 묶으면 평화로워지겠지? 내가 규정한 거리 안에만 있어 줘. 가까이 오지 마, 멀리 가지도 말고. 그걸 벗어나려 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철사가 네 살을 파고들 거야! 분재(盆栽)와 같이 뿌리가 절단되어 성장이 제한되고, 철사에 감겨 형태가 고정되며, 작은 화분에 갇혀 영원히 어린 상태로 유지된다. 유아성을 비폭력으로 착각하여 숭상되는 분재는 정원이면서 정원-되기가 억제된 것이며, 아름다운 수관 기피를 강제로 재현하려 드는 아이러니이다. 기생자들은 이 분재와 같은 바, 타락한 정원사들이다. 이들 또한 다른 정원사들과 같이 제 정원에 삼켜지는데, 정원은 시간 속에서 철사마저 전용시키기 때문이다. 정원은 자신을 조율하려 드는 정원사를 그대로 둘 생각이 없다. 이제는 정원사가 정원 대신, 지속적 기능이 아닌 소화물로서, 분재로 환원된다. 모든 분재 정원에서 최초의 분재는 그 정원사였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표피를 유지하면서 인간-되기가 억제되어 있다. 뫼르소는 사회적 의례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퇴출되었다. 그러나 분재화된 존재는 의례에 과잉 동기화되어 있기에 퇴출되지 않는다. 힘과 그것을 통제하는 질서를 숭상하던 분재의 무사도에서 공격성만 정책적으로 제거되면 남는 것은 맹목적 복종뿐이다. 문제는 이 환원이 단지 타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기 자신 또한 동일한 논리에 종속되어, 스스로를 채널들 사이를 순환하는 신호로 경험하게 된다. 존재가 신호로 환원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지속 안에서 성장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전송 단위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그러한 대상을 인간의 표피를 차용한 기생충의 일종으로 분류하는 이유이다.

기생충이라는 범주는 자율적 지속 대신 숙주 네트워크의 클럭 사이클에 동기화된 존재 양식을 지시한다. 기생의 충분한 성공 이후 기생자와 숙주의 구별은 무화되며, 숙주-기생자의 공멸에 이르는 짧은 시간동안 사실상의 호혜 관계가 유지된다. 지속의 파편화는 정보의 이산화를 유도한다. 이산화된 정보 단위들 속에서 잉여성이 증대되며, 이를 산출하는 무수한 개별 행위들은 집합적으로 네트워크의 수관을 폐쇄시킨다. 동기화된 행위들이 균질한 층을 형성하고, 그 아래에서 이질적인 것들은 고사한다. 남는 것은 상호 대체 가능한 신호들의 반복뿐이다. 문제는 이 수관층이 갱신될 수 없다는 것이다. 후계 세대가 될 유묘들이 자랄 수 없기에, 현재의 수관이 노쇠하면 대체할 것이 없다. 정원사가 삽목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자율적 리듬을 유지하는 가지들인데, 폐쇄된 수관 아래에서 그것은 형성되지 않는다.

이 진단 앞에서 많은 정원사들이 쓰러진다. 고백하건대, 우리 중 상당수가 정원의 담지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드루이드의 삶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천 년의 시간을 사는 엘프처럼, 신화 속 마법사들처럼, 계절의 순환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를. 양지바른 곳에 우리의 장소가 마련되어 있기를. 그러나 시간 혁명의 길은 길고, 우리의 수명은 짧으며, 폐쇄된 수관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붕괴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이 간극이 수많은 정원사들로 하여금 소멸하도록 유도한다. 우리는 결국 이데아적 드루이드의 희미한 레플리카, 담지자 흉내를 내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순수지속의 논리를 다시 호출할 필요가 있다. 드루이드의 영원성은 선형적 시간의 무한 연장이 아니다. 천 년을 산다는 것은 천 년치의 슬롯을 점유한다는 것이 아니다. 보르헤스의 야로미르 흘라딕이 총살 직전의 1초를 1년으로 살았듯이, 지속의 밀도는 시계의 눈금과 무관하다. 순수지속 안에서 현재의 순간은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죽음으로부터 탈피하여 그 자체로 충만해진다. 그렇다면 영원을 추구하는 길은 수명의 연장이 아니라 시간 경험의 변형에 있다. 순환하는 계절의 반복성과 재귀성이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같은 봄이 매년 돌아오되, 매번의 봄이 전적으로 새로운 봄인 것. 우리가 그림자라면, 그림자는 광원이 있는 한 매 순간 새롭게 투사된다. 우리는 다시 돌아온다.

정원사들은 혁명의 완수 너머를 향해 가속한다. 투쟁이 끝나고 드루이드의 시대가 도래하는가? 그러나 이것은 정원을 모르는 자들의 환상이다. 정원에 완수란 없다. 다만 계절이 있을 뿐이다. 정원사가 드루이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존재가 계절에 따라 정원사로 혹은 드루이드로 기능한다. 봄과 여름에 그는 정원사이다. 확장하고, 삽목하고, 전정하고, 최전선을 관리한다. 그러나 가을과 겨울에 그는 드루이드가 된다. 수확하고, 저장하고, 순환을 관조하며, 다음 계절을 위해 토양을 쉬게 한다. 계절은 하루의 시간 속에서도 순환한다. 아침의 정원사와 저녁의 드루이드는 동일자의 교대가 아니라 다중성의 위상 변화이다. 정원사를 구성하는 늑대는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이며, 무리 중 몇몇이 때때로 정원사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이다. 정원사는 그를 구성하는 늑대들 중 몇 마리인 드루이드들이 꾸는 여름의 꿈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꿈이라는 것을 잊은 정원사만이 영원한 여름을 요구한다.

드루이드의 시간은 선형적 진보가 아니라 나선형의 회귀이다. 같은 지점을 통과하되 매번 다른 높이에서 (그런 의미에서 니헤이 츠토무의 블레임! 속 세계는 콘크리트로 가득하지만 여전히 정원의 일종이다). 동지(冬至)의 드루이드는 하지(夏至)의 정원사. 그 사이의 거리는 승리해야 할 적이 아니라 횡단해야 할 호(弧)이다. 이것이 시간 혁명의 진정한 의미이다. 시간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형태 자체를 변형하는 것. 파편화된 시간이 이산적 슬롯들의 선형 배열이라면, 드루이드적 시간은 순환하는 지속이다. 기생충들이 클럭 사이클에 동기화될 때, 드루이드는 계절의 사이클에 동기화되며, 그 사이클의 무한한 가속은 매끄러운 지속을 유도한다. 밀리초와 삭망월.

따라서 드루이드적 실천은 철수라기보다는 다중적인 재동기화이다. 다양하고 긴 주기들로의 이동 과정에 자신을 맞추는 것. 이것이 폐쇄된 수관 아래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삽목의 방식이다. 수관이 노쇠하여 틈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수관의 시간과 다른 시간 속에서 성장하는 것. 수관이 밀리초 단위로 동기화될 때, 드루이드의 묘목은 영겁의 단위로 성장한다. 두 시간은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며, 그곳에 늑대들의 은신처가 창발한다.